01 · 핵심 요약 · 90초
계약서에 적힌 권리를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쓰겠다고 적혀 있지 않은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이었다. 흥국생명의 결정은 계약상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6일 만에 뒤집혔다. 그 6일 동안 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이 사건의 전부다.
2022년 11월 1일 흥국생명은 2017년 11월 9일 발행한 5억 달러 규모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공시했다. 신종자본증권은 만기가 30년 이상이거나 정해지지 않아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되는 채권이다. 계약상 만기는 길지만 시장은 5년 시점의 조기상환을 전제로 가격을 매겨왔다. 국내 금융회사가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공시 다음 날부터 가격이 무너졌다. 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은 10월 말 99.7달러에서 11월 4일 72.2달러로 27.6% 떨어졌다. 같은 구조를 가진 다른 발행사 채권도 함께 내렸다. 동양생명은 83.4달러에서 52.4달러로 떨어졌고, 한경 집계 기준 신한금융지주 8.9%, 우리은행 11.1%, 동양생명 37.2%의 하락이 나타났다. 로이터와 블룸버그가 이 사안을 보도했다. 11월 7일 흥국생명은 예정대로 조기상환하겠다고 발표를 뒤집었고, 11월 9일 상환이 이뤄졌다. 자금은 시중은행의 환매조건부채권 매입으로 마련됐다. 언론 보도 기준 4,000억원에서 5,000억원 규모였고, 태광그룹도 자본확충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사건은 개별 회사의 자금 문제가 아니라 한국 발행사 전체의 조달 비용 문제로 번졌다. 해외 투자자는 개별 발행사가 아니라 국가와 업종 단위로 위험을 조정한다. 2022년 하반기 국내 채권시장이 이미 경색된 상황에서 이 결정이 나왔다. 이후에도 보험사의 자본확충 부담은 계속됐다. 흥국생명은 2025년 11월 7,000억원 규모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태광그룹 계열사 티시스가 2,000억원, 티캐스트가 300억원을 인수하는 유상증자를 했다. 조기상환일이 돌아올 때마다 같은 구조의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
02 · 자세한 이야기
사건은 이렇게 전개됐다
약 8분03 · 금융구조
돈·정보·책임은 어떻게 움직였나
신종자본증권은 장부에는 자본으로 적히고 시장에서는 5년 만기 채권으로 거래되는 상품이다.
만기를 길게 잡아 자본으로 인정받는다
만기가 30년 이상이거나 정해지지 않고 변제 순위가 뒤에 있으면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된다. 보험사는 이 자본으로 지급여력비율을 맞춘다. 주식을 새로 발행해 지분이 희석되는 것을 피하면서 자본을 늘리는 방법이다.
→5년 뒤 조기상환권을 붙인다
만기가 30년이면 투자자가 사지 않는다. 그래서 5년 시점에 발행사가 원금을 갚을 수 있는 권리를 붙인다. 투자자는 이 시점을 사실상의 만기로 보고 수익률을 계산한다.
→갚지 않으면 금리가 올라간다
조기상환을 하지 않을 경우 금리를 올리는 조항이 들어간다. 흥국생명은 미국 국채 5년물에 2.472%포인트를 더한 금리였다. 발행사가 스스로 상환을 선택하게 만드는 장치다.
→관행이 깨지면 같은 구조가 함께 흔들린다
금리 상승기에는 대체 발행 비용이 가산금리보다 높아진다. 그러면 갚지 않는 쪽이 경제적으로 유리해진다. 한 곳이 그 선택을 하면 시장은 같은 구조의 다른 채권도 다시 계산한다. 동양생명, 신한금융지주, 우리은행 채권이 함께 떨어진 이유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나
계약과 관행이 어긋난 지점이 문제였다. 계약서는 조기상환을 권리로 규정하고 미행사 시 금리를 올린다고 정해 두었다. 시장은 그 조항을 실제로 쓰는 발행사가 없다는 전제로 가격을 매겼다. 2022년 금리 급등으로 새 채권 발행 비용이 가산금리를 넘어서면서 이 전제가 처음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발행사 하나의 판단이 국가 단위로 확대됐다. 해외 채권시장에서 한국 금융회사 발행분은 '한국물'로 묶여 거래된다. 개별 신용도보다 발행국의 관행이 가격에 반영되는 부분이 크다. 그래서 흥국생명의 결정이 곧바로 다른 회사의 조달 비용으로 옮겨갔다.
당국의 판단 시점이 늦었다. 11월 2일 금융위원회는 당사자 간 협의 사항이라고 했다. 계약 관계로만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장이 개별 계약이 아니라 관행을 보고 있다는 점이 반영되지 않았고, 나흘 뒤에는 은행 자금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개입해야 했다.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발행 단계에서 조기상환 재원을 함께 계획하는 것이 이후의 기준이 됐다. 흥국생명은 2025년 11월 7,000억원 규모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태광그룹 계열사 티시스 2,000억원, 티캐스트 3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받았다. 시장 발행에 기대지 않고 대주주 자금으로 재원을 확보한 것이다.
2022년 11월 당국은 채권시장안정펀드 활용을 검토했고 최종적으로는 4개 시중은행의 환매조건부채권 매입으로 자금이 마련됐다. 금융위원회는 11월 9일 은행장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개별 회사의 계약 문제라도 시장 전체의 조달 여건에 영향을 주면 당국이 조정에 나선다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계약상 권리와 시장 관행이 어긋날 때 누가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는지는 여전히 정해져 있지 않다. 조기상환을 하지 않는 것은 위법이 아니므로 제재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됐다. 조기상환일이 몰리는 시기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
최종 부담계약자·보험금·장기 신뢰
04 · 국민 행동수칙
확인 · 대응 · 신고
신종자본증권은 증권사 창구에서 개인도 살 수 있는 상품이다. 이름에 자본이 들어 있지만 예금이 아니다.
지금 확인할 것
- 설명을 들을 때 '만기'와 '조기상환일'을 구분해 확인한다. 계약상 만기는 30년이거나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5년은 발행사가 갚을 수 있는 날짜일 뿐이다.
- 조기상환이 발행사의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라는 사실이 상품설명서에 적혀 있는지 확인한다. 미행사 시 적용되는 가산금리 조건도 함께 본다.
- 이자 지급이 정지되는 조건을 확인한다. 신종자본증권은 발행사의 자본비율이 일정 수준 아래로 내려가거나 배당이 정지되면 이자를 주지 않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경우가 있다.
- 발행사의 지급여력비율과 신용등급을 확인한다. 보험사 경영공시는 각 사 홈페이지와 생명보험협회(klia.or.kr), 손해보험협회(knia.or.kr)에서 볼 수 있고, 발행 관련 공시는 DART(dart.fss.or.kr)에서 확인한다.
일이 생겼을 때
- 청약 전 상품설명서와 투자설명서를 받아 보관한다. 나중에 설명 내용을 다투게 되면 이 서류가 근거가 된다.
- 설명이 실제 계약 내용과 다르면 금융소비자보호법 제47조에 따라 위법계약해지를 요구할 수 있다. 위반 사실을 안 날부터 1년, 계약을 맺은 날부터 5년 이내다.
- 분쟁조정이나 소송을 준비한다면 금융소비자보호법 제28조 제3항에 따라 금융회사가 가진 판매 관련 자료의 열람을 요구할 수 있다.
- 분쟁조정 신청은 금융감독원 e-금융민원센터(fcsc.kr)에서 한다. 합의가 되지 않으면 금융분쟁조정위원회에 회부된다.
어디에 신고하나
- 금융감독원 1332 또는 e-금융민원센터(fcsc.kr).
- 금융소비자정보포털 파인(fine.fss.or.kr)에서 금융회사 경영공시와 상품 정보를 확인한다.
- 발행 공시와 사업보고서는 DART(dart.fss.or.kr)에서 조회한다.
답하기 어렵거나 확인되지 않은 항목이 있으면 결정을 미룹니다.
- 01
만기가 5년이라는 설명만 듣고 있지 않은가. 계약서상 만기를 확인했는가.
- 02
조기상환은 관행이라 반드시 갚는다는 말을 근거로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 03
이자 지급이 정지될 수 있는 조건을 설명받았는가.
- 04
이 채권이 다른 채권보다 변제 순위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05
예금보다 금리가 높은 이유를 상대방이 숫자로 설명했는가.
상설 확인 창구
- 금융민원·분쟁조정금융감독원 1332 · fcsc.kr
- 내 계좌 조회·일괄 지급정지어카운트인포 payinfo.or.kr
- 내 명의 휴대전화 조회엠세이퍼 msafer.or.kr
- 내 보험 전체 조회내보험 찾아줌 cont.insure.or.kr
- 기업 공시 확인전자공시시스템 dart.fss.or.kr
- 금융소비자 정보포털파인 fine.fss.or.kr
05 · 필자의 결론
흥국생명은 계약을 어기지 않았다. 조기상환권은 권리였고, 쓰지 않는 대신 더 높은 금리를 내겠다는 조건도 계약서에 있었다. 그런데도 6일 만에 결정을 되돌려야 했다. 이 사건이 남긴 것은 금융계약에서 문서와 관행이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문서는 개별 회사와 투자자 사이의 것이지만, 관행은 시장 전체가 공유하는 전제다. 전제를 깨는 비용은 그것을 깬 회사만 부담하지 않는다. 당국이 처음에 당사자 간 협의라고 한 판단은 계약 측면에서는 정확했다. 다만 시장은 계약을 개별로 읽지 않는다. 조기상환일이 몰리는 시기에 이 사건을 다시 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사건과 관련된 금융상품
- 신종자본증권(영구채)만기가 사실상 없고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되는 채권이다. 이름은 채권이지만 이자를 건너뛸 수 있고 5년 뒤 갚는다는 것도 발행사의 권리일 뿐 의무가 아니다.
- 후순위채발행사가 무너지면 다른 채권자를 모두 갚은 뒤에야 순서가 오는 채권이다. 그 대가로 금리가 높고, 만기 전에 돌려달라고 청구할 권리는 없다. 부실 때 일반채권보다 먼저 손실을 부담한다.
- 외화표시채권원리금이 달러나 엔 같은 외국통화로 표시되고 그 통화로 지급되는 채권이다. 이자를 제때 받아도 환율이 내리면 원화로는 손실이 난다. 발행자 신용과 환율 두 가지에 원금이 걸린다.
06 · 근거 자료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자료
독자가 판단의 근거를 직접 추적할 수 있도록 감독당국 발표, 판결, 공시와 연구자료를 제시한다. 사실관계 기준일은 2026.08.06이다.